목록브런치작가 (11)
엘리의 정원

국민학교 1학년. 처음 받은 숙제는종합장을 삼등분으로 접고크레파스로 단어를 써오는 거였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덧붙였어요.“크레파스가 번지니까, 뒷면은 쓰지 말아요.” 그게 숙제의 규칙이었어요.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는데엄마가 물었어요.“왜 뒷면은 안 써?” 저는 선생님 말대로 했다고 말했어요.그런데 엄마는, 제가 잘못 들은 거라고 했어요.“종이가 아깝잖아. 뒷면도 써.” 그렇게,뒷면까지 써서 숙제를 해갔어요. 그리고 다음 날,선생님은 제 뺨을 때렸어요. 눈물이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흘러내렸어요.너무 서러웠어요. 마침 비가 오던 날이었고엄마가 우산을 들고 학교로 저를 데리러 왔어요.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어요.엄마도 따라서 눈시울이 붉어졌고저를 앞질러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어요. 나는 ..

홍콩야자에 꽃이 피었어요. 처음엔 몰랐어요.잎 사이에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생겨나길래잎이 새로 나려나, 했죠.하지만 아니었어요.벌써 3년째 키우는 아이인데,이런 일은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식물들의 감정을조금은 읽을 수 있어요.이 야자나무는,밖에 있는 걸 유독 좋아했어요.비가 오면 비를 맞히고,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게 했죠.보통은 실내 식물이라는데…얘는 밖에 두는 게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고맙게도,꽃을 피워 주었어요. 세상에.이 나무에서, 그것도현관 계단 한켠,그늘지고 바람 많은 곳에서꽃이 피다니요. 홍콩야자는꽃을 거의 피우지 않아서그 꽃말이 ‘행운’이라고 해요. 그래서 오늘은,이 조용한 기적을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요. 이 아이도 꽃을 피우느라 아마 힘들었을까요? 엘리의 정원에서.계단 위에서 조용히 피..

브런치에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엘리의 정원: 잊혀진 문》.기억을 잃은 소녀와 이상한 정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피코, 요요, 쉬쉬, 스위피…조금 이상하지만 사랑스럽고 귀여운 친구들도 등장해요. 동화 형식이지만,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예요. 브런치에선 일요일, 화요일, 목요일주 3회 연재하고 있어요.이곳 티스토리에는 가끔,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남겨보려 합니다. 읽고 싶은 분들은 아래 링크로 오셔도 좋아요. https://brunch.co.kr/brunchbook/elliesgarden

아빠랑 바지를 사러 갔어요.어버이날이라서요. 아빠는 배가 많이 나왔어요.팔다리는 가늘어졌는데, 배만 동그랗게 튀어나왔어요.당뇨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아빠는 술을 끊지 못하세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잔소리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걸 알거든요. 바지를 고르는 것도 일이에요.인터넷 쇼핑은 꿈도 못 꿔요.키가 작고 배만 나왔으니직접 입어봐야만 해요. 매장에 갔어요.아빠가 “허리 38이야.”라고 말했어요. 38 사이즈를 펼쳐봤어요.순간 저는 너무 놀라 말했어요.“아빠, 이거 너무 큰데? 36 입어 봐.”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바지를 받아 들고피팅룸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뒤, 커튼이 열렸어요.바지는, 너무 작았어요.허리가 터질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어요.“아빠~ 진짜 살 빼야 하는 거 ..

텃밭을 지나던 어느 날,나는 깜짝 놀랐어요.초록색 장갑이 하나,쫄대 위에서 ‘딱’— 서 있었거든요. “헉… 뭐야, 저거… 설마… 허수아비?” 나는 괜히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의 정원에 이런 캐릭터도 있으면 재밌겠다!’생각하며 기묘한 스토리를 막 써 내려가고 있었죠. 하지만 그때,아빠가 나타나 한마디. “그거, 그냥 장갑 말리는 거야.” … …뭐라고요? 🤨 “비 맞았잖아. 젖어서 그냥 꽂아놓은 거야.”하시면서 태연하게 지나가시는 아빠. 그 순간모든 판타지와 허수아비의 로망은사정없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어요. 하지만 웃겼어요.정말 너무 웃겼어요.‘아… 나 또 혼자 너무 몰입했구나…’ 싶어서. 그 초록 장갑은허수아비도 아니었고,비밀스러운 정원 수호자도 아니었지만—이상하게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 맴돌았어..

피코가 마킹을 할 때면,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걸 보면,괜히 마음이 설레요. 오늘은 문득,중학교 때 미술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여러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 것도 번거롭고,미술에 소질도 없었던 저는그 시간이 마냥 싫었어요. 특히공원이나 산에 모여 그림을 그리는,그 ‘사생대회’라는 날을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함께 나무와 꽃을 그리라고 하는 그 시간이왠지 강요처럼 느껴졌던 걸까요? 수채화 붓을 꾹꾹 눌러 잎사귀를 표현하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도,그때는 그저 지루한 주문 같았어요.그런데, 이제야고개를 들어 나뭇잎을 바라보면,그때 왜 그렇게 그리라고 했는지알 것 같아요. 대학원 재학 때,소중한 것을 디지털 아트로 표현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요. 교수님이 말씀..

게임을 하다 보면,하늘을 날다가 ‘툭’ 튕겨 나오는 구역이 있어요.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허락되지 않은 경계. 그동안 나는자꾸만 그쪽으로 가려했던 것 같아요. 익숙했던 일로,이전의 자리로,한때 능숙했던 역할로요.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그건 비활성화된 구역이었어요. 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저는 계속 그쪽으로 가려했어요.튕겨 나오고,다시 가고,또 한 번 더 가고… 그게 내 길이라고,거기에 내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놓지 못했어요. 사실,예전 스테이지로 돌아가려면방법은 있었던 것 같아요.그 길이 아예 없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거기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어요.돌아가도,다시 시작되진 않더라고요. 그 문은,조용히 닫혀 있었어요.그런데 요즘,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게임에도설정된 진행 방향이 ..

얼마 전, 쿠팡 물류센터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어요.주변에서는 겁을 주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엄청 힘들다”, “지옥이다”… 그런 말들이요.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다녀왔어요. 예전에 유통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어서쿠팡 물류센터는 어떻게 운영될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찝찝해 보이는 작업화를 신었고,제 사이즈는 없어서 헐렁한 신발을 신고 하루를 보냈어요.조끼도 낡고 더러워 보였지만, 그냥 입었어요. 처음에는 소분 업무를 맡는 줄 알았는데갑자기 무전이 오더니, 다른 구역으로 인원을 지원해 달라고 했어요.그래서 저는 다른 곳으로 보내졌어요. 그곳에서는 화물차가 도착하면RT(롤테이너, 바퀴 달린 구르마)를 끌고 화물차에서 내리기도 하고,소분된 상품이 실린 RT를 다시 실어 보내는 작업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