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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의 정원

꿈에서나는 커다란 배 위에 있었어요. 망망대해를 가르는 배.어디서 출발했는지도,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그 배에 머물고 있던 나는 왠지 모르게 설레어했어요. 그 배에서 내리려면시험을 통과해야 했어요.‘여권’을 받아야만다음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는그런 설정이었어요. 나는 한 단어를 계속 외우고 있었어요.익숙하지 않은 철자. 같은, 어딘가 이상한 단어. 꿈속에서, 그건 '과거'를 뜻했어요.하지만 아무리 반복해도그 단어가 외워지지 않았어요. 노트에 줄을 긋고, 다시 쓰고,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외웠지만자꾸만 틀렸어요. 배에서는 파티가 열렸고,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고기를 굽고 있었어요.그 속엔오래전 인연이었던 전 남자친구도 있었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어요."같이 고기 좀 먹어줄래.?" 나는 예의상 고개를..

국민학교 1학년. 처음 받은 숙제는종합장을 삼등분으로 접고크레파스로 단어를 써오는 거였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덧붙였어요.“크레파스가 번지니까, 뒷면은 쓰지 말아요.” 그게 숙제의 규칙이었어요.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는데엄마가 물었어요.“왜 뒷면은 안 써?” 저는 선생님 말대로 했다고 말했어요.그런데 엄마는, 제가 잘못 들은 거라고 했어요.“종이가 아깝잖아. 뒷면도 써.” 그렇게,뒷면까지 써서 숙제를 해갔어요. 그리고 다음 날,선생님은 제 뺨을 때렸어요. 눈물이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흘러내렸어요.너무 서러웠어요. 마침 비가 오던 날이었고엄마가 우산을 들고 학교로 저를 데리러 왔어요.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어요.엄마도 따라서 눈시울이 붉어졌고저를 앞질러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어요. 나는 ..

홍콩야자에 꽃이 피었어요. 처음엔 몰랐어요.잎 사이에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생겨나길래잎이 새로 나려나, 했죠.하지만 아니었어요.벌써 3년째 키우는 아이인데,이런 일은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식물들의 감정을조금은 읽을 수 있어요.이 야자나무는,밖에 있는 걸 유독 좋아했어요.비가 오면 비를 맞히고,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게 했죠.보통은 실내 식물이라는데…얘는 밖에 두는 게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고맙게도,꽃을 피워 주었어요. 세상에.이 나무에서, 그것도현관 계단 한켠,그늘지고 바람 많은 곳에서꽃이 피다니요. 홍콩야자는꽃을 거의 피우지 않아서그 꽃말이 ‘행운’이라고 해요. 그래서 오늘은,이 조용한 기적을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요. 이 아이도 꽃을 피우느라 아마 힘들었을까요? 엘리의 정원에서.계단 위에서 조용히 피..

브런치에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엘리의 정원: 잊혀진 문》.기억을 잃은 소녀와 이상한 정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피코, 요요, 쉬쉬, 스위피…조금 이상하지만 사랑스럽고 귀여운 친구들도 등장해요. 동화 형식이지만,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예요. 브런치에선 일요일, 화요일, 목요일주 3회 연재하고 있어요.이곳 티스토리에는 가끔,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남겨보려 합니다. 읽고 싶은 분들은 아래 링크로 오셔도 좋아요. https://brunch.co.kr/brunchbook/elliesgarden

아빠랑 바지를 사러 갔어요.어버이날이라서요. 아빠는 배가 많이 나왔어요.팔다리는 가늘어졌는데, 배만 동그랗게 튀어나왔어요.당뇨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아빠는 술을 끊지 못하세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잔소리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걸 알거든요. 바지를 고르는 것도 일이에요.인터넷 쇼핑은 꿈도 못 꿔요.키가 작고 배만 나왔으니직접 입어봐야만 해요. 매장에 갔어요.아빠가 “허리 38이야.”라고 말했어요. 38 사이즈를 펼쳐봤어요.순간 저는 너무 놀라 말했어요.“아빠, 이거 너무 큰데? 36 입어 봐.”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바지를 받아 들고피팅룸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뒤, 커튼이 열렸어요.바지는, 너무 작았어요.허리가 터질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어요.“아빠~ 진짜 살 빼야 하는 거 ..

새벽 네 시에피코가 저를 깨웠어요.나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너무 피곤했어요.잠든 지 얼마 안 됐고,점심엔 가족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거든요.그래서 “하우스~”라고 외치고그냥 다시 잠들었어요. 다섯 시가 됐을 때피코가 또 깨웠어요. 이번엔 짜증을 내면서 일어났어요.피코가 앞발을 팡팡 구르며 너무 좋아했어요.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갔어요.그때까지만 해도그냥 산책이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어요.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라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피코가 묽은 변을 싸고,세 발자국을 걷더니 토를 했어요. 아, 그랬구나…그걸 보자그제야 상황이 이해됐어요. 그때 피코가뒷발을 세차게 차더니스스로 신호를 주는 듯,앞발을 팡팡 두 번 구르고신나게 뛰어나갔어요.시원했는지,살 것 같았는지. 그 모습을 ..

텃밭을 지나던 어느 날,나는 깜짝 놀랐어요.초록색 장갑이 하나,쫄대 위에서 ‘딱’— 서 있었거든요. “헉… 뭐야, 저거… 설마… 허수아비?” 나는 괜히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의 정원에 이런 캐릭터도 있으면 재밌겠다!’생각하며 기묘한 스토리를 막 써 내려가고 있었죠. 하지만 그때,아빠가 나타나 한마디. “그거, 그냥 장갑 말리는 거야.” … …뭐라고요? 🤨 “비 맞았잖아. 젖어서 그냥 꽂아놓은 거야.”하시면서 태연하게 지나가시는 아빠. 그 순간모든 판타지와 허수아비의 로망은사정없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어요. 하지만 웃겼어요.정말 너무 웃겼어요.‘아… 나 또 혼자 너무 몰입했구나…’ 싶어서. 그 초록 장갑은허수아비도 아니었고,비밀스러운 정원 수호자도 아니었지만—이상하게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 맴돌았어..

피코가 마킹을 할 때면,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걸 보면,괜히 마음이 설레요. 오늘은 문득,중학교 때 미술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여러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 것도 번거롭고,미술에 소질도 없었던 저는그 시간이 마냥 싫었어요. 특히공원이나 산에 모여 그림을 그리는,그 ‘사생대회’라는 날을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함께 나무와 꽃을 그리라고 하는 그 시간이왠지 강요처럼 느껴졌던 걸까요? 수채화 붓을 꾹꾹 눌러 잎사귀를 표현하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도,그때는 그저 지루한 주문 같았어요.그런데, 이제야고개를 들어 나뭇잎을 바라보면,그때 왜 그렇게 그리라고 했는지알 것 같아요. 대학원 재학 때,소중한 것을 디지털 아트로 표현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요. 교수님이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