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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기록🏡

새벽 네 시, 피코가 불렀어요

정원지기 엘리 2025. 5. 7. 20:09

아무도 없는 새벽

새벽 네 시에

피코가 저를 깨웠어요.

나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너무 피곤했어요.

잠든 지 얼마 안 됐고,

점심엔 가족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하우스~”라고 외치고

그냥 다시 잠들었어요.

 

다섯 시가 됐을 때

피코가 또 깨웠어요.

 

이번엔 짜증을 내면서 일어났어요.

피코가 앞발을 팡팡 구르며 너무 좋아했어요.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산책이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어요.

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

피코가 묽은 변을 싸고,

세 발자국을 걷더니 토를 했어요.

 

아, 그랬구나…

그걸 보자

그제야 상황이 이해됐어요.

 

그때 피코가

뒷발을 세차게 차더니

스스로 신호를 주는 듯,

앞발을 팡팡 두 번 구르고

신나게 뛰어나갔어요.

시원했는지,

살 것 같았는지.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너무 복잡해졌어요.

몹시 미안했어요.

 

피코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속 저에게 말을 했고

저는 알아듣지 못했어요.

피코와 제가 함께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피코는 저를 원망하지 않고

그저,

아무렇지 않게

산책을 즐기는 거 아니겠어요.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무너졌어요.

너무 미안하고, 또 고맙고요.

 

혼자 몇 시간 동안이나

배가 아픈 채로 끙끙 참았을지.

제가 하우스라고 외치고 나서

한 시간 동안 혼자 꾹 참았을 생각을 하니까

너무 속상했어요.

 

'피코야~

너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나를 믿어줬고,

나는 그 믿음 안에서

늦게라도

너의 마음에 공감하고 싶었어.'

 

엘리의 정원에서.

새벽을 걸으며,

아직도 배우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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